모스크바 공관원은 왜 탈북자를 내쫓았나?

<골 때리는 선교사가 가장 과학적으로 맞혔던 말>

난생 처음 선교사를 만난 것은 1992년 6월25일 하바롭스크에서였다. 선교사는 악당 중에 악당이란 북한 선전과 정반대였다. 마음이 이렇게 좋은 사람은 처음 보았다.

하지만 전도하는 가르침만은 정말 골 때렸다. 하늘에 뭐 있다고 저렇게 열정적인지 이해 할 수 없었다. 북한 선전대로 비과학적이었다. 하지만 가장 과학적으로 맞았던 말이 있다. 사람 세상은 믿을 게 못 된다. 하나님 나라 외에 믿을 데가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불과 며칠 안으로 즉시 확인되었다.

장소는 모스크바 남조선 대사관에서였다. 대사관에는 먼저 들어온 탈북 벌목공인 듯한 3명이 있었다. 분위기가 쌀쌀하였다. 공관원이 그들을 내쫓고 있는 것이다. 안 나가면 경찰을 부르겠다고 하면서 말이다. 북한 사람이 이곳에 찾아오는 것은 보통 고민과 결심이 아닌데 말이다.

나 자신부터 목숨을 걸고 중국, 북한 감옥을 거치며 아시아와 구라파 대륙을 거쳐 찾아온 것 아닌가. 종시 탈북자들을 내쫓고 우리 앞에 온 공관원이 그런다. “북한 놈들이 자꾸 찾아와서 골치 아프네요.”

살겠다고 찾아온 이들을 쫓아 보낸 것이 안쓰러운지 “저들이 무슨 죄! 북한에서 태어난 죄이지요” 한다. 옆에 있던 선교사가 황급히 이분도 북한 사람이라고 하니 놀란다. 한국 양복에 멀끔한 사람이 방금 내쫓긴 북한 사람과 같지 않아서였다.

선교사의 간단한 설명을 하자 알아 들었는지 미안해 한다. 냉정한 현실은 내 앞에도 마찬가지였다. 탈북자를 받지 않는다는 위의 지시가 있어서였다. 이 글을 쓰는 현재인 2024년에 결과를 보여준 것처럼 북핵은 완성을 넘어서 위협 단계에 와있다. 그럼에도 30여 년 전 정치는 북한 통치자에게 자극을 주지 않고 핵 문제를 ‘남북 기본합의서’같이 협상으로 저지한다는 방침이다. 그 희생 제물이 북한 동포이고 탈북자인 것이다.

내가 직접 본 남조선 삐라에는 귀순하면 환영은 물론 금덩어리를 상으로 준다고 유혹하고 있었다. 진짜 와보니 뻥인 것이다. 정치에도 사정이 있을 수는 있다. 핵 문제 해결을 위해 정말 북한을 자극하기 않기 위해 탈북자를 받지 않아야 했을까. 명백한 거짓말이다.

그 당시 콩고 북한 대사관 성원이었던 고영환 씨가 탈출하자 노태우 대통령의 친서로 설득하여 남한에 데려왔다. 또 잘 아는 탈북 동료 영변 핵시설 부직장장이었던 김대호는 군함까지 동원하여 남한에 데려왔다. 북한도 이걸 모를까. 서로 눈감고 아웅하는 정치 모략들인 것이다.

한 줌도 안되는 정치가들의 잔치에 북한 동포는 안중에 없는 것이다.골 때리는 선교사 말이 확인되었다. 하나님 외에는 누구도 믿을 수 없다고. 아마도 믿음의 시작은 이때부터인 것 같기도 하다. 지금도 좌우익 정치에서 비록 우익적 활동을 하는 것 같지만 사실 어느 편에 서지 않게 되었다. 편에 든다면 진리편 뿐이다.

아무튼 선교사는 하바롭스크로 돌아가야 했다. 모스크바에 아무런 연고가 없었고 여비도 빠듯했기 때문이다. 헤어지니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를 잃는 상실감이었다. 골 때리기는 했지만 그만큼 부자지간 같은 정이 생겼던 것이다.

하나님께 맡기듯 대사관에 나를 맡기고 갔으니 대사관 직원도 얼떨결 안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러 접수는 하였다. 누군지 파악을 위한 조사 기간이 주말까지 포함 5일 걸린 것 같다.

그동안 정치에 대한 실망감에 너무 충격이 커서 병들어 눕기까지 했다. 그 어려운 탈북노정 풍찬노숙하면서도 이처럼 고열에 시달린 적이 없었다. 주택 아파트가 바라 보이는 공원 긴 의자에 누워 앓는데 구급차가 온다. 누군가 신고한 것 같다. 아프지만 병원에 가면 정체가 탈로날까 보아 괜찮다고 구급차를 돌려 보냈다.

골이 빠개지듯 아푼 고열 속에서 공원 의자에 누워 하늘을 하염 없이 바라봤다. 선교사의 말이 자꾸 떠오른다. 하나님 외에 누구도 믿을 수 없다고. 대사관에서 쫓겨난 탈북자들은 어디로 갔을 까. 나는 그래도 접수라도 받는 특혜자였다. 북한 과학원 연구원 출신이라선지 아니면 증인자처럼 한인 선교사가 데려온 자가 되어서일까.

대사관에서 접수 조사가 끝나자 허진 선생이란 유명한 반북 인사에게 거처를 소개한다. 허진 선생의 본명은 허웅배이며 그 증조부가 허위 의병장이며 서울 왕산로가 그 분의 아명을 딴 것이다.

허진 선생은 남 출신으로 월북하여 소련 유학을 간 분이었다. 하지만 스탈린 비판운동의 여파로 북한에서도 김일성 비판 세력에 합세하였다가 모스크바 유학지에서 체포되어 북송 될 위기 대사관에 탈출한 분이다. 자신 말로 자기가 첫 탈북자라고 할 정도였다.

좀 내용이 빗나간 감이 있어 제 길로 들어서 말한다. 어떤 이들은 경찰을 부르겠어 하며 탈북자를 내쫒은 공관원을 욕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그들도 어쩔 수 없는 처지였다. 위에서는 받지 말라고 하지, 탈북자는 밀려오지, 그렇다고 이들을 피신시킬 계획이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밑에서만 아웅되고 있는 것이다. 통일을 위해 통일부를 비롯한 통일 연구원들이 거창하지만 현실적인 준비는 하나도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도 이런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하나님은 나를 들어 쓰시려고 준비한 것 같다. 모스크바 선교사들과 함께 있으면서 한국 최대의 월간지 월간조선 조갑제 편집장과 연계되어 이러한 현실을 만천하에 공개하였다. 교회에 은거한 탈북자들을 모아 ‘러시아 탈북 난민 협회’도 결성하였다.

역시 민주 사회의 장점은 이것이었다. 귀순자를 환영하여 받는 줄 알았는데 정반대라는 진실이 알려졌다. 여론이 들끓자 탈북자를 전원 수용하는 쪽으로 선회하였다. 그것도 유엔(UNHCR)의 확인 하에 탈북자의 남한 입국을 담보하게 된 것이다. 유엔 난민증(UNHCR) 제1호를 받은 자로 이 길을 개척한 주인공으로 나를 쓰신 것이다. 그동안 귀순자라고 하던 말도 이때 저의 의견이 기사에 반영되어 탈북자로 명명된 시초가 되었다(1994년 4월 호 월간조선 ).

– 이민복(대북풍선단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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