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북한인권법 20주년 기획] ➁ 노스코리아메리칸, 20년의 평가

북한 출신인 노스 코리안이 미국 국적자인 아메리칸으로 새 삶을 시작하는 ‘노스코리아메리칸(NorthKoreAmerican)’의 길을 터 준 법이 어느세 시행 20년이 되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한 이들에게 미국에서 자유를 영위하며 정착해서 살 수 있도록 새로운 길을 열어준 북한인권법의 정식 명칭은 “North Korean human Right Act of 2004”입니다.

북한인권법은 북한의 인권 상황을 미국 의회가 처음으로 문제 제기한 법이라는 점에서 주목받았습니다.

2004년10월 18일 공표된 후 2008년, 2012년, 2018년 세 차례 재승인되었고 현재 미국 의회의 재승인 과정에 있습니다.

탈북민 중 사상 처음으로 미국 망명을 허용받았던 고 신요셉 씨는 2006년 미국 정착 직후 자유아시아방송과의 전화통화에서 마침내 ‘자유’를 찾았다며 울먹였습니다.

신요셉: 왜 우리 북한 땅만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중국에 있는 탈북자들도 팔려 다니고, 물건입니까, (흐느낌) 아무튼 우리가 이렇게 미국까지 오게 된 것에 대해 진심으로 너무 감사드립니다.

2006년 5월 5일, 북한인권법의 첫 수혜자로 6명의 탈북민이 미국에 입국한 이후 2024년까지 미국 정부로부터 난민 지위를 인정받아 정착에 성공한 탈북민은 230에서 240명으로 파악됩니다.

자유아시아방송과 인터뷰 하고 있는 토마스 바커(Thomas Barker) 변호사. /RFA PHOTO

“자유를 위해서!” ‘탈북민의 쉰들러’ 변호사를 놀라게 한 인터뷰

토마스 바커 변호사는 13년째 미국에 정착하려는 북한 출신에게 무료로 법률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오십 여명이 바커 변호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2차 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 무참히 살해되던 유대인을 구출하는데 인생을 바쳤던 오스카 쉰들러와 비견할 수 있다고 해서 ‘탈북민의 쉰들러’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수 많은 사건 중 지원 활동을 시작할 무렵에 만난 탈북민이 이민국 인터뷰에서 답한 일성(一聲)이 강산이 변하는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습니다.

토마스 바커 변호사: 이민국 심사관이 미국 영주권을 신청한 그 사람에게 “왜 북한을 떠났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듯이 심사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단호하게 답했습니다. “자유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북한을 떠났겠습니까?”

바커 변호사는 북한 출신 탈북민의 미국 시민 선서식에 참석할 때마다 그날이 떠오른다고 했습니다.

난민지위를 인정받고 미국에 입국하면 정착까지 어떤 정부지원을 받을까요?

임시 거처와 매달 1천 500 달러 이하의 생활비, 의료보험, 영어와 직업교육 등을 석 달 동안 지원한다는 게 국무부의 난민부처의 설명입니다.

직업교육을 거친 북한난민이 직장을 구하면 공식적인 정부의 지원은 중단됩니다.

난민정책 전문가는 탈북민의 미국 정착이 다른 지역 출신보다 상대적으로 더 어려운 과정을 감내해야 하는 상황일 것이라고 진단합니다.

언어, 문화, 환경의 차이에 적응해야 할 뿐만아니라 북한에서 배웠던 기술과 경험을 활용하는 직업이 미국에서는 드물어 구직과 생활의 어려움이 가중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결국 시간이 성공적인 정착에 결정적인 요소라는 결론입니다.

워싱턴의 동남아시아자원행동센터(Southeast Asia Resource Action Center)의 핼리 리 정책옹호국 국장은 다른 지역 출신 난민의 경험을 통해 탈북민의 미국 정착도 그려볼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리 국장은 공산주의체제를 피해 미국에서 난민지위를 받고 정착한 동남아시아인이 1975년부터 120만 명에 이르지만 정착 초기 언어와 환경의 차이로 겪는 어려움과 공산정권을 탈출하는 과정의 정신적 불안증세로 인한 건강악화라는 이중고를 겪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현재 미국 의회와 행정부, 기업에 많은 사람이 진출했다며 탈북민의 미국정착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진단했습니다.

미국 정부의 탈북민 정착과 관련한 노력이 부진했음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탈북자들과 미국 인권운동가들이 지난 26일 주미 중국 대사관 앞에서 북송 된 탈북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RFA PHOTO

1996년부터 북한 인권을 위해 활동해온 미국의 민간단체 디펜스 포럼과 북한자유연합의 수잔 숄티 대표는 북한인권법보다 1년 앞선 2003년 미국 의회를 통과한 버마자유민주법을 예를 들었습니다.

한 달에 1천300명 가량의 버마인이 미국 정부의 망명 허가를 받아서 정착하는 데 비해 탈북민은 20년 동안 240명에도 미치지 못하는 1달에 1명 수준에 그쳤다고 했습니다.

수잔 숄티: 미국 의회는 아주 자세하게 미국 정부가 북한 출신 난민을 도와야 한다고 북한인권법에 명시했습니다. 하지만 미국 행정부가 의회의 주문을 이행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고 봅니다.

북한인권법으로 탈북민의 미국 정착을 지원하는 자금을 배정했지만 효과적으로 사용되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미국 정부의 예산으로 2005년 미국과 한국, 유럽에서 북한인권대회를 개최했던 프리덤 하우스의 북한 관련 업무를 맡았던 구재회 전 북한인권국장은 난민 심사를 담당하는 미국 정부 부처가 국무부나 국토안보부로 단일화되지 않아서 연방수사국, 이민국 등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할 뿐만 아니라 탈북자의 미국 입국을 허용하는 심사기준이 복잡하고 엄격했다고 지적했습니다.

구재회: 민주주의인권노동(The Bureau of Democracy, Human Rights and Labor/DRL)국이 대북활동을 지원하는 예산을 배정받았지만, 동아태국과 업무 조율이 안돼서 많은 단체가 지원받지 못했습니다.

북한 인권 증진을 위해 2005년부터 4년간 연간 2,400만 달러의 예산을 집행할 수 있도록 했지만 효율적인 집행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지적입니다.

로버트 킹 전 미국 국무부 북한인권특사. /연합뉴스

미국의 북한인권법 시행 이후 국제사회의 북한 인권 개선의 목소리 커졌다

미국에 정착한 탈북민의 수가 법 시행 초기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미국 의회와 정부가 북한인권법을 채택하고 시행하면서 국제사회에 북한 인권 개선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미국이 북한인권법을 채택한 후 일본정부에 이어 한국도 북한인권법을 채택했고 유엔에서도 매년 북한인권 개선을 촉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있다고 로버트 킹 전 국무부 대북인권특사가 말했습니다.

로버트 킹: 미국 의회가 북한인권법을 검토하던 시기에 유엔 인권이사회도 북한인권 문제를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유엔은 북한인권 문제 특별보고관의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미국의 북한인권법과 유엔이 북한의 인권개선을 위해 거의 동시에 움직였던 것입니다.

북한인권법 시행 이후 미국 내의 북한 인권에 대한 관심도 커졌습니다.

탈북민을 위한 무료 변호를 하는 바커 변호사는 영화 한 편이 자신의 인생을 바꿨다고 말했습니다.

바커 변호사: 크로싱을 상영한다는 기사를 월스트리트 저널에서 보고 케나다 벤쿠버로 비행기를 타고 갔습니다. 그때가 부시 대통령이 북한인권법에 서명하고 4년 후였습니다. 저는 그 영화를 보고 탈북민을 돕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북한 주민의 비극을 담은 영화 크로싱을 본 미국인들은 2004년 채택된 ‘북한 인권법’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고 했습니다.

킹 전 북한인권특사를 비롯한 북한인권 개선을 촉구하는 목소리를 내는 활동가와 전문가들은 북한인권법이 외부 세계 소식의 북한 유입에 큰 역할을 했음을 강조하면서 북한도 ‘국제기준’인 글로벌 스텐다드를 따르는 인권 인식을 가져야 한다는 메세지를 북한 주민과 지도부에 전달하는 효과가 있었다고 분석합니다.

에디터 이진서, 웹편집 김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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