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은 하나님 뜻, 민족과제, 동시에 세계적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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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2년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과 한국갤럽이 2022년 통일의식 조사 결과를 발표하였다. 조사 결과 응답자의 58%가 통일이 필요 없다고 하였으며, 응답자의 42% 만이 통일이 필요하다고 대답하였다. 이 조사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통일이 필요하다고 응답한 비율은 점점 줄고, 통일이 필요치 않다고 응답한 비중이 20대와 30대를 중심으로 늘어난다는 것이었다. 통일되지 말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응답자의 34.1%가 통일에 따르는 경제적 부담이라고 대답하였으며, 21.5%는 남한과 북한 간의 정치 체계의 차이를 그리고 20.3%는 통일 이후 생겨날 사회적 문제라고 대답하였다. 2022년 통일 의식 조사는 통일의 필요성, 통일이 가져다줄 이익에 대한 기대감 그리고 통일 이후의 삶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증가하고 있으며, 통일 보다는 현 체제의 유지를 선호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동안 통일의 이유로 “같은 민족이니까 통일해야 한다.” “이산가족의 아픔을 해소할 수 있다.” 그리고 “통일이 가져다줄 경제적 이익” 등이 제시되었지만, 젊은 세대들은 이러한 것들은 통일하지 않고 화해와 협력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실제로 젊은 세대 안에는 북한과 같은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약하기에 같은 민족이니까 통일해야 한다는 인식에 대해 부정적인 경향이 있다.

지난 5월 필자가 워싱턴을 방문해서 ‘한반도 평화 법안(H.R. 1369)’을 발의한 브래드 셔먼(Brad Sherman) 공화당 의원과 찍은 사진이다.

젊은 세대에게 통일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남북분열의 원인과 전개 과정 그리고 지난 분단의 역사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 제시되어야 한다. 남북분단의 고착화를 이해하려면 1943년 카이로 회담(Cairo Conference)으로부터 1945년 얄타 회담(Yalta Conference)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흐름과 1950년 6월 25일 발생했던 한국전쟁의 원인과 전개 과정 그리고 결과를 설명해주어야 한다. 역사는 해석의 문제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역사관의 충돌을 경험하고 있다. 한국전쟁과 관련해서도 전쟁의 원인을 김일성과 소련 그리고 중국과 같은 공산주의 진영의 팽창정책으로 보는 전통주의적 견해와 남북한의 사회구조적 모순에서 보는 수정주의로 나누어져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 수정주의는 한국 내부에서 발생한 내부적 모순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부르스 커밍스(Bruce Cuming)는 한국전쟁의 원인을 1945년부터 1950년 사이에 한반도에서 일어난 일런의 사건을 중심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전쟁의 원인을 해방정국의 민족해방 움직임과 미군정의 남북분단 고착화에서 찾았다. 따라서 전쟁은 결국 일어날 일이었고, 누가 방아쇠를 당겼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전쟁은 내전이며, 내전은 어느 한쪽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커밍스의 주장은 1990년대 공개된 후루시쵸프(Nikita Sergeyevich Khrushchev, 1894~1971)의 회고록, 미 정부의 비밀문서에 의해 잘못된 것임이 밝혀진다. 이들 문서는 한국전쟁은 소련의 지원과 묵인 아래 김일성 주도로 일어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국전쟁과 관련해서 상당수의 학자가 한국전쟁을 남한과 북한 사이에 일어난 내전이 아닌 국제적인 관점에서 보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데이비드 핼버스템(David Halberstam)는 전쟁이 있기 전까지 정책의 주요결정 자들이 얽히고설키면서 만들어낸 사건들의 인과 관계에 주목하면서, 한국전쟁이 단순한 내전이 아닌 미국, 소련, 중국, 일본이라는 지정학적 관계와 냉전이라는 당시 국제정세 속에서 발발한 세계전쟁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윌리엄 스툭(William Stueck)은 한국전쟁을 미국과 소련 그리고 중국의 3대 강국의 역학관계로 보던 기존의 관점에서 나아가, 한국전쟁은 전쟁의 기원부터 국제적인 성격이었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한국전쟁은 지리적으로는 한반도에 국한되었지만, 그 영향력은 세계적이었다. 한국전쟁과 관련해 흥미로운 견해 가운데 하나는 한국전쟁은 냉전의 분위기를 고조시켰지만, 역설적으로 냉전의 완충지 역할을 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해리 투르먼(Harry Trumann, 1884~1972)은 우리는 한국에서 3차 세계 대전을 막기 위해 싸우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국전쟁은 부분적으로 내전의 성격이 있지만, 한국전쟁의 본질은 세계 이념전쟁이었다. 스툭이 지적한 바와 같이 한국전쟁은 지역의 문제이자 동시에 국제적인 문제였다. 한국전쟁은 민족 분단을 넘어 세계 분단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한민족이 냉전시대에 세계 최대의 비극을 감내하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전쟁은 한국인이자 동시에 세계인으로서 한민족이 짊어져야 할 짐이었다.

남한과 북한의 통일을 이야기하려면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통일이 한민족의 문제를 넘어선 세계적인 것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한반도의 통일은 분열된 민족이 하나가 되는 것을 넘어서 냉전의 종식을 의미한다. 한국전쟁은 2차대전 이후 냉전 체제에서 냉전의 완충지 역할을 해야 했던 한민족이 짊어져야 할 짐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통일은 우리 민족과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는 통일을 민족을 넘어선 세계사적인 관점,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통일의 문제를 보아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통일은 하나님의 뜻이며 민족의 과제임과 동시에 세계적인 사명임을 인식하게 된다. 남북한의 통일은 2차대전 이후에 치유되지 못했던 동·서 혹은 좌·우 이념대립의 치유라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남북한의 통일은 화해와 평화의 통일이 되어야 한다. 그동안 우리는 어떻게 통일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주로 이야기해 왔다. 하지만 다음 세대에 통일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방법론보다는 통일해야 하는 이유를 먼저 설명해야 한다. 통일을 민족을 넘어선 언약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 하나님 나라 관점에서 우리의 역사를 보아야 한다. 구원의 핵심 요소는 하나 됨이다. 제사장 나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지역과 지역, 계층과 계층 그리고 남성과 여성 나아가 남한과 북한 그리고 동북아 및 세계 평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통일은 하나님의 뜻이다.

예레미야 31장은 새언약을 중심으로 통일될 이스라엘을 예언하고 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때에 내가 이스라엘 모든 종족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렘31:1) 예레미야 31절은 24절은 “유다와 그 모든 성읍의 농부와 양 떼를 인도하는 자가 거기에 함께 살리니”라고 함으로써 통일될 이스라엘은 서로 대립하던 사람들이 함께 거주하는 곳이 될 것임을 말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대립 관계에 있었던 농부와 목자들이 함께 화목하게 되는 것은 서로 반목하던 이스라엘과 유다가 함께 시온을 예배의 구심점으로 삼을 때 가능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통일의 기초를 발견하게 된다. 통일의 기초는 하나님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새 언약 관계를 맺은 남한과 북한은 동북아 나아가 세계 평화를 이루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이사야 9장부터 11장은 다윗과 같은 이상적인 왕에 의하여 다시 통일될 공평과 평화의 왕국인 이스라엘이 앗수르의 야만적인 세계 정복 질서에 대한 대안임을 제시하고 있다. 이사야 11장 6절부터 9절은 메시야가 다스리는 공동체가 어떻게 바뀌는가를 보여준다. “6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9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6절과 8절에 나오는 이리, 어린 양, 표범, 송아지, 어린 사자, 암소와 곰, 독사와 같은 동물은 메시야가 통치하는 나라가 어떤 모습인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이사야 11장 9절은 하나님에 의해서 실현된 샬롬의의 공동체가 온 세상에 확장될 것임을 말하고 있다.

“19그 날에 애굽 땅 중앙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이 있겠고 그 변경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기둥이 있을 것이요 20이것이 애굽 땅에서 만군의 여호와를 위하여 징조와 증거가 되리니 이는 그들이 그 압박하는 자들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부르짖겠고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한 구원자이자 보호자를 보내사 그들을 건지실 것임이라 21여호와께서 자기를 애굽에 알게 하시리니 그 날에 애굽이 여호와를 알고 제물과 예물을 그에게 드리고 경배할 것이요 여호와께 서원하고 그대로 행하리라 22여호와께서 애굽을 치실지라도 치시고는 고치실 것이므로 그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들의 간구함을 들으시고 그들을 고쳐 주시리라 23그 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24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및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25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 (이사야 19:19~24)

남한과 북한의 통일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한반도를 넘어 동북아 나아가 온 세상에 확장되는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남한과 북한의 통일을 통해 우리나라가 제사장 나라가 되고, 하나님에 의해서 실현된 의와 샬롬의 공동체가 주변 국가에 영향을 미쳐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온 세상에 충만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비전이 되어야 한다. 남한과 북한, 일본과 중국, 러시아와 미국과 같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대립하던 나라들이 함께 손을 잡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을 감당하는 그 날을 기도하며 준비해야 한다.

샬롬은 이사야 9정부터 11장에 나타난 것처럼,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의를 실현하는 의의 공동체에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동안 우리는 선물로서의 샬롬을 이야기했다. 선물로서의 샬롬에서 과제로서의 샬롬으로 나가야 한다. 개인적인 샬롬이 개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복이라면 공동체적 샬롬은, 샬롬을 누리는 각 성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명이다. 샬롬은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위탁된 사명이다. 교회는 샬롬을 누림과 동시에 샬롬을 이루어가는 사명 공동체이다.

– 특별기고 / 라영환 교수(총신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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